
서지은 보험설계사·칼럼니스트ㅣ어릴 적, 등교할 때는 분명 하늘이 맑았는데 방과 후 집에 가려니 갑작스레 내린 비로 발목을 붙잡힌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어떤 아이는 준비성이 좋아 미리 챙겨둔 우산을 썼고, 또 어떤 아이는 이까짓 거 하며 책가방을 머리에 받친 채 용감하게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은 우산을 들고 와줄 엄마나 아빠를 기다렸다. 저 멀리서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치고 다른 한 손에 내 우산을 든 엄마가 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은 어찌 그리 반가운지. 또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는 처마 밑에 홀로 남은 순간은 어찌 그리 서럽던지.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믿었다. 엄마나 아빠가 꼭 내 분홍색 우산을 들고 와줄 거라고. 그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마침내 엄마가 보이면 눈물이 다 났다.
일테면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은 그런 우산 같은 존재다. 비가 와도 매번 우산을 가지고 와주는 엄마나 아빠처럼 믿음직한.
1997년 대한민국에 IMF 외환 위기가 닥쳤고, 이는 많은 것들을 바꾼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었다. 은행이 우산처럼 내 자산을 지켜줄 거라는 당연한 믿음에 금이 가면서 1997년 11월 외환 위기라는 태풍이 심각한 금융 불안을 초래하자 정부는 한 번에 대규모로 예금을 인출 하는 뱅크런(Bank Run) 사태 방지와 금융시장 회복을 위해 모든 예금을 전액 보호하는 블랭킷 보장(Blanket Guarantee)을 임시 조치로 도입한다.
이 결정은 IMF(International Money Fund, 국제 통화기금)와의 구제금융 협상과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예금보험공사가 기존 보험 제도를 활용해 2000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예금 부분 보장에서 전액을 보장하겠다고 결정한다. 다만, 부실 금융회사가 고금리로 예금을 무리하게 유치하는 부작용이 나타나자 1998년 8월 이후 가입한 예금에 대해서는 원금 2000만원 이하 시 원리금 2000만원까지 보호, 원금 2000만원 초과 시 원금만 전액 보호하도록 바뀌었다.
그 후 금융시장이 안정세를 찾으면서 2001년 1월부터 전액 보호제도에서 기존의 부분 보호제도로 환원했다. 대신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보호 한도 금액은 기존의 2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상향 조정한 후 지금까지 이 한도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2025년 9월 1일부터 예금자 보호 한도가 기존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24년 만에 2배나 오르게 되었다. 은행과 저축은행, 신협, 농협, 수협, 산림조합, 새마을금고 등 모든 예금보험공사 부보의 금융회사와 상호 금융권에 동일 적용하며, 일반예금과 별도로 각각 보호 한도가 정해져 있는 퇴직연금과 연금저축, 사고보험금 보호 한도를 함께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조정했다.
사실 예금자보호법의 한도금액이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은 꾸준히 거론 되어왔기 때문에 이로써 예금자가 더 두텁게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현행 예금 보호 한도 내에서 여러 금융회사에 예금을 분산해 예치해 오던 사람들의 불편도 해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해외 주요국 수준으로 예금자를 보호하고 보호되는 예금의 규모가 증가해 금융시장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자그마한 삼단우산에서 폭이 넓은 장우산으로 갑작스러운 폭우를 피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예금자 보호 한도의 상향으로 이에 다른 예금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예금자 보호제도는 금융회사가 파산했을 때 예금 보호 공사가 예금자 대신 보호해 주는 제도다. 이때 필요한 재원은 평소 금융회사들이 예금 잔액의 일정 비율을 예금보험료(이하 예보료)로 납부해 적립하는데, 만일 한도 상향으로 예보료율이 올라가면 금융회사가 예금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간 예금자보호법 한도 상향이 통과되지 않은 배경에는 예보료가 걸림돌이 된 부분도 있다. 즉,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소비자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 때문. 금융 당국이 국회에 제출한 예보 연구용역 결과에 의하면 예금자 보호 한도를 1억원으로 상향하면 예보료율은 현행 수준에서 최대 27.3% 상승할 것으로 추산했다.
한도 상향으로 혜택을 받는 예금자는 100명 중 1명으로 극소수임에 반해, 보험료율 인상에 따른 대출 상품 조달 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대출 금리 및 보험료 상승으로 소비자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현 은행권보다 예금 금리가 놓은 제2금융권으로 자금이 쏠리는 '머니 무브'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또한 보호 한도 상향으로 수신이 늘어날 만한 곳은 중소형 저축은행일 텐데 금융 당국이 가계 대출 관리를 강조하는 상황에서 대출로 내주지 못하는 지금을 쌓아두면 부담만 커지니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는 분위기다.
이러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다양한 대응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자금 이동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부실 금융사를 선제 지원할 수 있는 금융 안정 계정을 도입해 악영향을 최소화할 방침이며, 예금 보호 한도 상향에 따른 적정 예보율을 검토해 2028년부터는 새로운 보험료율을 적용할 예정이다. 소비자는 기존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한도가 높아진 만큼 분산 예치의 필요성이 감소해 관리가 편리해질 뿐 아니라 저축은행과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를 비교해 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곳으로 예치할 수 있어 투자 매력도가 높아졌다.
모든 변화에는 순기능도 있지만 그에 따른 부대낌이 없을 수 없다. 예금자보호법의 변화 역시 24년 만에 이루어진 만큼 단시간에 안정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와 아빠가 가져다주는 우산을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먼저 기상예보를 살피고 그날의 날씨에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폭풍이 발생하는 빈도수가 높지 않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작 일이 발생했을 때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내가 된다. 현관 우산꽂이에 내가 언제든 지니고 나갈 수 있는 크고 튼튼한 장우산을 마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장우산을 제대로 들기 위해서 팔근육을 키우려는 노력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지은 필자
하루의 대부분을 걷고, 말하고, 듣고, 씁니다. 장래희망은 최장기 근속 보험설계사 겸 프로작가입니다.
마흔다섯에 에세이집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줄이야>를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