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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기의 일본의 눈] 쓰시마 히모로기, 신라에서 온 ‘신사’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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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ne 10, 2019, 16:06:33

김정기 교수가 쓴 일본이야기4. 신라어 ‘해모로기’가 ‘히모로기’로 전와

 

[정리=인더뉴스 박명기 기자] 이전 이야기들에서 알 수 있듯이 쓰시마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쓰시마 남단 쓰쓰 마을의 적미가 그렇고 소토산의 성황당 돌단이 또한 그렇다.

 

이번 이야기가 다루는 ‘히모로기(神籬)’는 더욱 생생하게 숨쉰다. 히모로기란 무엇인가. 일본의 권위 있는 코지엔(広辞苑) 사전에 의하면 “옛날 신령이 묵고 있다고 생각되는 산-숲-노목등 둘레에 상록수[常磐木]를 심어 울타리를 두룬 신성한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일본인이 정의한 ‘히모로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추적하기 위해 일본의 에도(江戶)시대[1603~1867] 후기 걸출한 고증학자 토-테이칸(藤貞幹, 1732~1792)이 남긴 저서에 주목해 보자.

 

그가 지은 <쇼코오하츠>(衝口發)란 책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내용을 터뜨리고 있다. “개벽 후에 위로는 ‘스사노오 신(素戔鳴尊), 아래로는 오오나무치 신(大己貴命: 이즈모(出雲) 대사의 주신인 대국주신의 다른 이름-지은이)로부터일이 시작되었으니 사물과 언어가 모두 한속(韓俗)이라”라고.

 

다시 말하면 언어와 종교[불교와 무교]를 포함한 모든 “문물이 한속(韓俗)의 여풍(餘風)이었던 고로”라고 적어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토의 문물을 빼놓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하는 의문을 솔직히 토로한 것이다.

 

이 솔직한 말에 당대 국학자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얼마나 격분했던지 그를 ‘미친 놈’이라며 ‘겸광인(鉗狂人)’을 써 지탄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토오테이칸이 발설한 ‘히모로기(神籬)’의 실상이다. 그것이 신라에서 온 신사의 원형이라고 쓰고는 ‘히모로기’가 신라 말이라고 일깨우고 있다.

 

히모로기(神籬)는 후세의 신사(神祀)니라. 무어라 해도 그 사람이 몸소 제사하는 주재자를 거두는 것[物]이니라. 이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읽는데 본래 신라 말[元新羅の辞]로, 그것을 임시로 쓰고 있는 것이 니라...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가져온 쿠마노히모로기(熊神籬)도히보코가 조상님[父祖の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金達寿, <古代朝鮮と日本文化>, 47 재인용).

 

[神籬は, 後世の神祀也. 何にしても, 其人の体として祭る主を蔵る物也. 此を比毛呂岐(히모로기)訓ずるは元新羅の辞にして, それを仮りて用いるものなり... 天日槍が携 来, 熊神籬も, 日槍が父祖の主なること知べし.]

 

여기서 말하는 히모로기는 임동권 교수가 이전 이야기에서 말하듯 흙 단에서 돌단으로 진화한 단계의 한 모습인데, 무당의 당집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이 쓰시마에 남아 있는 적석탑 또는 누석단의 후세 모습이다. 그것이 후세에 발전하여 오늘날 일본의 신사로 된 것이다.

 

위에서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왔다는 쿠마노히모로기란 무엇인가? <일본서기> 스이닌(垂仁) 천황 3년 조에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내귀(来帰)했다며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3년 춘 3월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내귀했다. 가져온 물건은 하후토노타마(羽太玉) 한 개, 아시타카타마(足高玉) 한 개, 우카카아카시타마(鵜鹿鹿赤石玉) 한 개, 이즈시소도(出石小刀) 한 자루, 이즈시 창(出石鉾) 한 자루, 해 거울[日鏡(히노카가미)] 한 면, 쿠마노히모로기(熊神籬) 한 벌[一具] 모두 합해 일곱 물건이니라.

 

아메노히보코가 가져온 물건에는 일본 천황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삼종의 신기’가 모두 나오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쿠마노히모로기이다. 위서로 가득 찬 <일본서기> 조차도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쿠마노히모로기를 가져왔다고 인정한다.

 

쿠마노히모로기의 ‘쿠마(熊)’는 한인들이 믿는 신성한 영물 곰이기에 ‘신성한 히모로기’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아메노히보코가 무거운 돌더미의 실물을 몸소 지고 왔을 리가 없기에 ‘쿠마노히모로기 한 벌’이란 요새 말로 스케일 모델[scalemodel, 즉 실물의 축소판]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한 주석자는 이 쿠마노히모로기에 대해서 예의 한반도 편견을 드러낸다. 사이키(佐佰有義)라는 주석자는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일본]의 ‘히모로기’와 비슷한 바가 있으므로 그렇게 불렀으리라”고 적고 있다(佐佰有義, <일본서기> 권 상, 127).

 

그러나 북한 사회과학원 ‘원사’ 김석형(金錫亨)은 이를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라고 지탄하고는 “일본 ‘히모로기’가 따로 있고, ‘쿠마[조선] 히모로기’가 따로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며, “일본식 ‘히모로기’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신사를 의미하며 곧 ‘신사(神祀)’을 말한다고 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 ‘히모로기’는 “바로 신궁(神宮), 신사(神社)을 의미하며 곧 무당의 당집이다. 후세에 이르러 우리나라에서는 마침내 천시되여 버렸지마는 일본에서는 계속 국가적인 보호를 받아왔다”(김석형, 1966, 137)고 일깨웠다.

 

김석형은 결국 <기기>가 전하는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선진지대로서의 한국으로부터 지어 일본의 신궁, 신사용 도구까지 가져 왔다는 것은 고국의 당집과 왜 땅의 이주민 정착지의 당집들이 같았으며, 따라서 거기서 사용하는 모든 의례용 도구들이 같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고 결론을 내렸다(김석형, 위 책, 137).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그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가 적은 ‘신궁’과 ‘히모로기’의 용례를 견주어 보고는 히모로기가 바로 신궁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정곡을 찌르는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祭祀) 조에 신라의 종묘(宗廟)로서 처음 든 것이 시조묘(始祖廟)이고이는 제2대 남해왕 3년(기원 6년)에 설립되었다고 하였으며, 이때 왕의 친누이 아로(阿老)를시켜서 제사를 맡게 하였다고 하였다. 계속해서 제22대 지증왕 (9년-기원 508년) 때에는 시조가 탄생한 곳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세웠다고 하였다...따라서 <시조묘> 즉 <신궁>이었던것이고 신궁의 주재자 즉 무당의 우두머리는 귀족(왕족)의 녀인이었다(강조 글쓴이)...

 

 

이상과 같은 조선적 신궁에 대하여 일본식 신궁이 그리 다를 것이 없었음은 <일본서기>에서 볼 수 있다. 즉 2권, 제5 <숭신 천황> 6년(기원전 92년에 해당하나 사실은 6~7세기 경의 이야기일 것이다) 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이보다 앞서 <아마-테라스-오-미가미>[천조대신-지은이]와 야마도[倭]의오-구니-다마(大國魂)의두 신을 <천황>이 사는 대전(大殿) 안에 제사하였다. 그러나 그 신들의 기운(勢)이 두려워 함께 살기가 불안하였다. 때문에 <아마-테라스-오-미가미>를 <도요스끼-이리-히메노-미꼬도>(豊鍬入姬命)에게 맡겨 야마도에 가사누히(笠縫) 마을에서 제사하고 시키(磯堅城)에 히모로기를 세웠다. ...”(강조 글쓴이).

 

이것이 일본 력사에서 신궁이 왕의 소재지에서 떨어져 세워진 첫 기록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자로 표기된 <신궁>이 아니라 <히모로기>라고 하였다. <고사기> <숭신천황> 조에 <도요스끼-이리-히메>는 그의 누이라 하였고, 그 서술 본문 주해에 이 녀인이 주재(主宰)한 곳이 이세(伊勢) 대신궁(오늘도 천황가의 시조묘)이라고 하였다. 일본식 신궁도 시조묘이며 무당의 큰 당집이었고, 그 첫 주재자는 왕족의 녀인으로 되어 있다(김석형, 1966, 138, 주 12).

 

김석형은 일제시절 경성제국대학에서 스에마츠야스카즈(末松保和)에게 강의를 듣던 학생이었다. 그는 스에마츠가 ‘미마나’(任那, 이하 ‘임나’) 문제에 대한 강의를 할 때면 언제나 검정물을 들인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양손을 턱을 괸 채 그를 째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스에마츠는 어디에 눈을 둘지 몰라서 쩔쩔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김현구, 2002, 52). 스에마츠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주장한 학자다.

 

한국학자로서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사관을 옹호한 관변학자로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 그가 쓴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 1949)이다. 이에 대해 김석형은 오히려 삼한(三韓)과삼국(三國)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세운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데 이어 1966년 <초기조일관계연구>를 간행하여 일본 고대사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 ‘히모로기’ 논란 마침표를 찍은 쓰시마섬

 

그러나 ‘히모로기’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쓰시마 섬이다. 이 섬에는 히모로기의 성소(聖所)가 여기저기 보인다. 쓰시마 재지 학자 나가도메 히사에는 쓰시마 집락에는 ‘덴도지(天道地)’가많이 남아 있는데 이를 시게(しげ)라고 부른다며,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1)돌 사당[石の祀]을 지은 곳, (2)돌을 쌓아 단을 지은 곳[덴도단(天道壇)이라 함, (3)돌을 쌓아 탑을 만든 곳, (4) 돌을 배열해 구획을 지은 곳, (5) 자연의 숲을 성역으로 해 특정한 노수(老樹)을 신목으로 삼아 금줄[注連縄(시메나와)]을 치고 밑둥에 공물[幣]을 걸어 두는 곳[이를 시게라 함], (6)성역 가운데 단을 짓고 속인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곳[이 곳을 가나구라라고 함](永留久惠, 2009, 414).

 

그는 이와 같은 덴도지는 “모두 제사 유적이지만 신사는 아니다”라면서 이른바 신사신도(神社神道, 일본 전국의 신사나 제사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종교인데 메이지 이후 특히 교파신도와 구별하기 위해 쓰임-필자) 이전의 이와쿠라(磐座, 신이 진좌하는 곳-필자), 히모로기의 형식으로 특히 시게는 히모로기의 전형, 카나구라(神座)의 전형이라 말할 수 있다고(위 책, 414).

 

풀이하면 오늘날 호장한 신사가 들어 서기 이전 시게라고 부르는 히모로기가 신사의 원형으로 쓰시마에 21곳이나 남아 있다고 일깨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쓰시마의 시게, 즉 거목에 금줄을 치고 밑둥에 공물을 걸어두는 곳이야 말로 히모로기의 전형이라고 단정한다.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沢庄三郎, 1872~1967)란 일본의 언어학자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써 일제의 식민통치에 부역했지만, 그가 조선어 연구에 정통한 일본인 학자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는 또 다른 저서 <국어의 연구>에서 히모로기가 ‘조선어’라는 것을 고증했다. 일본말 어원에 밝은 김용운(金容雲) 교수가 지은이에게 설명한 바에 의하면 신라어인 ‘해모로기’가 ‘히모로기’로 전와된 것이며, 그것은 해를 모시는 우두머리 또는 해를 모시는 곳[城: 기]라고 풀이했다.

 

그 근거로는 일본어 ‘스메로기’ 황(皇) 또는 천황(天皇)이듯이우두머리 또는 큰 어른이라는 뜻이므로 태양신을 모시는 신라 이주민이 쓴 말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 아메노히보코는 신라의 무격을 일본에 전도한 고신도의 교주

 

앞서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일본에 가져온 ‘구마노히모로기’가 바로 신사의 원형이라했는데, 그는 조선 무교의 사제, 즉 무격(巫覡)이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는오-진 천황 단에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가 가져온 물건이 8개라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메노히보코(天之日矛)가 가져온 물건은 다마츠다카라(玉津寶: 옥의 보물)라고 하는 구슬 두 관, 또한 파도를 일으키는 히레[振浪比礼], 파도를 잠재우는 히레[切浪比礼), 바람을 일으키는 히레[振風比礼], 바람을 잠재우는 히레[切風比礼]등이다. 또한 오키츠 거울[奧津鏡], 헤츠 거울[辺津鏡] 모두 합하여 여덟 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히레란 무엇인가? <고지엔> 사전에 의하면 “고대 파도를 일으킨다든지 해충, 독사를 쫓아낸다든지 하는 주력이 있다고 믿어지는 천 모양의 물건”이라고. 이와 같은 서술을 종합하면 아메노히보코는 신라의 무격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그는 신라의 무교를 일본의 전도한 고신도의 교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 쓰시마에 있는 돌단 제단과 비슷한 조선식산성 ‘가네타 성’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쓰시마에는 돌단 제단과 비슷한 조선식산성이 있다. 그것이 상현의 미쓰시마(美津島)에는 쿠로세조-야마(黑瀨城山) 꼭대기에 있는 가네타노키(金田城)라고 불리는 조선식산성이다.

 

이 성은 <일본서기>에 의하면 텐지(天智) 천황 6년[667] 11월 조에 “...쓰시마국에 가나타노키(金田城)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일 작가이자 한일고대사에 밝은 김달수 씨는 쓰시마의 경치 좋기로 유명한 아소만(浅茅湾)을 바라보면서 감동적으로 “그 중 인상적인 것, 몇 가지만 쓰면 아소만에서 작은 배롤 타고 본 지로야마(城山)의 고대 조선식산성인 가네타성적(金田城跡)이 하나의 압권이었습니다”라고(金達寿, 1986, 233).

 

 

이 성을 쌓은 배경에는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하자 많은 백제의 곡나진수(谷那晋首) 장군을 비롯해 많은 백제의 관인은 일본으로 도망가 오-미(近江) 왕조의 관인이 되었다(위 책, 233).

 

이어 663년 백제부흥 전쟁이라 해야 할, 백촌강의 전투에서 왜-백제 연합군조차 여지없이 전멸해 버리고 말았다. 왜국에는 백제 부흥의 꿈은 사라지고 게다가 신라의 추격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국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북 규슈 후쿠오카의 다자이후(太宰府)의 대야성(大野城) 등 여러 곳에 쌓은 것인데, 쓰시마의 가네타 성도 그 하나다.

 

나그네는 최근 쓰시마 여행에서 이즈하라 시청 근처 종씨의 거처 가네이시조-(金石城) 쪽에서 조선식 산성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긴 적이 있다. 같이 간 일행 중 신광식 씨[전 KBS 보도본부장]는 10여 전 이 성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고.

 

“저렇게 높은 곳을 올라갔습니까?”

“그때만해도 젊었으니까요.”

“어떻든 가요?”

“견고한 돌로 쌓은 모양이 그대로 남아있더라구요”.

“왜 하필 산꼭대기에 지은 것이지요?”

“서울 외곽의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지 않을까요.”

“아, 그렇군요.”

 

참고문헌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북한] 출판사, 1966

金達寿, <古代朝鮮と日本文化: 神々のふるさと>, 1986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 비평사, 2002

永留久惠, <対馬国誌: ヤマトとカラの挟間で活きた対馬> 제1권 원시 고대 편, 2009

 

글쓴이=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

 

◇ 김정기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정치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언론학회 회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다.

 

저서로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I·II), 『전후 일본정치와 매스미디어』, 『전환기의 방송정책』, 『미의 나라 조선:야나기, 아사카와 형제, 헨더슨의 도자 이야기』 『일본천황, 그는 누구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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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명기 기자 pnet21@inth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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