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조성원 기자] 겨울방학 시즌입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교육열로 유명한 대한민국 부모님들 밑에선 아이들이 따스운 장판 위에 배 깔고 누워 ‘터닝 메카드’나 ‘명탐정 코난’을 즐기는 건 사치죠. 모르긴 해도 하루에 학원 서너 군데 정도는 방문판매원들처럼 돌 겁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어차피 대부분 장차 나라 경제의 윤활유가 될 미래의 영업사원들이니 미리 간접 경험해보는 것도 좋죠. 그래도 때때로 방학 기분은 나게 해줘야 고마운 줄 알고 학업에 매진해 훗날 학자금 대출도 빨리 갚고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좋은 요양병원도 마련해 줄 겁니다.
한 며칠 가족여행 다녀오는 것도 좋겠지만, 가까이서 비교적 쉽게 즐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영화 관람입니다. 단,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갈 때는 사랑을 듬뿍 담아 속삭여주시는 걸 잊지 마세요. "영화 보면서 떠들면 가게 될 학원이 하나 더 늘어날 거야."
방학 시즌엔 아이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다채로운 아동영화와 가족영화들이 극장을 찾아옵니다. 마침 이번 주에 8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의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교육적인 내용의 한국 환타지 영화가 막 개봉했습니다. 혼자 보고 온 ‘더 킹’을 소개해드리죠.
차 안에 탄 세 사람이 보입니다. 누가 봐도 정우성인 뒷자리 인물이 별 재미도 없는 얘기를 하니 안경 벗고 봐도 조인성인 주인공과 운전을 맡은 일반인 배우는 마치 식사 자리에서 부장님의 아재개그에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우리들처럼 열심히 웃어드립니다. 그러다 추돌사고가 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오프닝에서 영화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기간 동안에 발생한 실제 사건의 보도 화면들을 몽타주로 보여줍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가슴 아픈 모습들도 있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이 수의를 입고 재판정에 선 흐뭇한 장면들도 지나갑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박태수(조인성 분). 목포에서 3류 깡패이자 사기꾼인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과 살고 있는 고등학교 ‘짱’입니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라곤 해본 적 없던 태수는 어느 날 집으로 들이닥쳐 아버지를 쥐 잡듯 하는 검사를 보곤, 지금 학교 통 먹는 것보다 나중에 검사가 되는 게 제대로 된 힘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후 태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상경해 전라도 출신임을 숨기고, 학생운동같은 건 외면한 채 공부해 검사가 되고, 김아중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열심히 일하던 와중에 찝찝한 사건을 하나 맡아 고민하다 강식(정우성 분)을 소개받고, 강식의 밑으로 들어가 어릴 때 친구였던 두일(류준열 분)과 함께 대한민국의 진정한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분투하게 됩니다(헥헥...).
도입부부터 대강의 플롯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 작품이 왜 ‘교육적인 환타지 영화’인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환타지 부분을 먼저 얘기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지만 이 영화 속 인물들의 물리적 시간은 적어도 멈춰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사람들이 도무지 늙지 않습니다! 당장 주인공 태수는 80년대 초반 전두환 치세에서 시작해 몇 년 전인 이명박 대통령 시기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 얼굴이 그대로입니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고요. 21세기에 들어서면 정우성 옆머리에 흰줄 몇 개 보이는 게 다입니다.
물론 보톡스나 태반주사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예비 비(非)대통령’도 근래 들어 애용했을 만큼 최근의 기술인데 대체 어떻게 젊음을 유지했던 걸까요. 아마 천진난만한 아이들 눈엔 영화 속 인물들이 거의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나 뱀파이어처럼 보일 겁니다.
게다가 주인공 태수가 또 어마어마한 캐릭텁니다. 학교짱에 공부랑은 담 쌓고 심지어 가만히 앉아서는 책도 못 읽던 불량학생. 이런 녀석이 뜻을 품자마자 교내 시험 성적이 53등에서 12등으로 급등하더니, 급기야 러닝타임 2분여 만에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고 사법고시도 한 번에 패스합니다.
‘교육적’인 부분을 얘기해볼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는 근래 30여 년간의 한국 현대사를 실제 보도 영상을 통해 환기시켜 줍니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세 대통령의 정권 교체 시기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고, 특히 故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탄핵, 서거가 스토리와 연계돼 부각됩니다.
사회에 만연한 정치 무관심을 깨뜨리기 위해 몸소 희생양이 된 현재의 ‘대통령 직무정지자’ 덕분에 청소년부터 취업난에 시달리는 2,30대 청년층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사회 현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죠. 이 영화는 지금 현재 정치·사회 분위기가 어디서 시작해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에 대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자료가 될 법합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극중 인물들의 대사와 탄핵 결정에 살인미소를 날리는 현 대통령의 보도영상 속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아이들에게 ‘꿈을 꾸는 건 니 자유지만, 주제는 알되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우주처럼 나서서 도와주는 똘마니들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교훈을 심어줄 수 있을 겁니다. 이만하면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 딱 좋은 영화 아닌가요?
물론 어른들, 특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택하는 대신 "부장이 또 야근을 시키네"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동료들과 1차 소주 2차 노래방 코스를 택할 아빠들을 만족시킬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시커먼 남자들의 이야기에 심신이 지칠만하면 김아중배우를 필두로 미모로 ‘열일’하는 여성캐릭터들이 안구를 정화해줄 정도만 나왔다 들어갑니다. 좀 더 길게 많이 나오면 좋겠지만, 뭐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늘 이 정도였으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영화 ‘더 킹’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래도 썩 내키지 않아하시는 분들에게, 순전히 개인적으로 꼽은 이 영화를 봐야할 단 하나의 이유를 말씀드리며 끝내겠습니다.
“정우성이 노래방 마이크로 자자의 ‘버스 안에서’를 부르고 클론의 ‘난’에 맞춰 파워 댄스를 선보입니다.”